근대 시기 중국의 문호가 열리자 각종 서구의 사조가 물밀 듯이 흘러 들어와 사람들은 예측할 수 없는 조류로 인해 끊임없는 혼란을 경험해야 했다. 5.4 신문학 전사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5.4시기에 용감무쌍하게 싸우던 신문학 전사들은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구세력으로 바뀌어 새로운 혁명문학 운동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 새로운 혁명문학 운동이 바로 노동자 혁명 운동이다. 일반적으로 문예 사조는 사회사조와 관련 있지만 중국은 정치적 조류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즉 항상 정치가 선행되고 그 다음에 문예가 변해온 것이다.
1921년 노동자 혁명 운동이 중국 공산당의 지도아래 맹렬히 전개되기 시작했고 곧 문예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923~1924년 사이에 추사, 등중하, 운대영, 소초녀, 심택민 등 실제로 혁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혁명문학을 주장했다. 그들은 문학 자체의 발전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혁명 공작의 필요로부터 요구를 제시하며, 시문을 경시하고 실제 공작을 중시하는 경항을 공통으로 갖고 있었다. 대혁명의 발전에 따라 곽말약과 심안빙 등 많은 문예 종사자들이 잇따라 혁명 활동에 종사했다. 중국의 혁명문학 운동은 1926~1927년 사이의 대혁명 시대에 발생하지 않고 대혁명이 실패한 1928년에 발생했다. 이는 혁명 기간에는 다들 혁명에 바빠서 한가롭게 문학을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혁명이 실패한 후 일부 문인들은 상해로 내려가 지하로 잠적하여 창작을 하였고 일부 문인들은 일본에서 신흥 이론을 가지고 귀국함으로써 이 두 부류의 인물들이 혁명문학 운동을 주도했다. 그들은 창조사와 태양사를 진영으로 삼아 문화혁명의 주역인 노신과 한바탕 혁명문학 논쟁을 벌렸다. 노신 또한 전혀 흔들림 없이 반격을 가하였는데 이것을 1928년의 혁명문학 논쟁이라 한다. 이는 1930년대 좌익 문예 운동의 전주곡일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혁명문학 운동에 대해서도 깊은 영향을 끼쳐 혁명문학 운동 중에 문제점이 생기거나 또 다른 문예 이론이 도입된다 하면 언제나 이 논쟁이 거론되었다.
1. 의식성과 심미성
일종의 문학 운동을 제창하거나 문학 유파를 건립하려면 ‘무엇이 문학인가?’, ‘문예의 본질적인 특징은 무엇인가?’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문예의 본질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는 문예 실천에 대한 서로 다른 방향을 결정한다. 예를 들면 재도파는 봉건적인 도덕을 선양했고 5.4 신문학 운동가들은 재도설과 구문학을 비판하고 문예에 대해 새로운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그들 역시 본질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 즉 일부는 문예를 사회 생활의 반영으로 여겼고 일부는 문예를 심령의 자아 표현이라 여겼기 때문에 서로 다른 문예 단체와 창작 유파를 형성하였다.
창작사의 일원이었던 성방오는 신문화 시절에 개성주의를 기초 사상으로 삼은 자아 표현설을 주장하다가 자신의 문학관을 바꿔 문학을 사회 구조 가운데 하나인 사회의식 상태로 여겨 문학을 연구해야만 사회의 전체 구조에 대해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초리 역시 ‘계급의식설’로써 문학의 임무는 그것의 조직능력에 있고 무산계급의 문학은 무산계급의 계급의식을 만들어 내는 투쟁적인 문화의 일종이라 하였다. 그들은 마르크스와 관련된 경제 기초와 상부 구조 학설로부터 이와 같은 관점을 내세웠기에 대다수 혁명 문학가들의 일치한 찬성을 얻었다. 하지만 사실 여기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다. 하나는 그들이 지나치게 사회의식의 능동적인 역할을 강조하여, 실제적으로 마르크스의 기본 관점인 사회 존재가 사회의식을 결정하고 사회의식이 사회존재를 일정하게 반영은 하지만 그 영향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점을 파악하지 못했다. 또 다른 오류는 그들이 생각한 사회의식은 문학이었지만 마르크스의 사회적 의식은 법률, 정치, 종교, 철학, 예술 등을 모두 포함한 광범한 사회의식이었다는 것이다. 단, 예술을 다른 의식형태와 동등하게 여기지 않고 사유하고 있는 두뇌를 중요시한 것이다.
혁명문학 초반에 곽말약은 문학의 본질은 감정에서 시작되어 감정에서 끝난다 했고 성방오도 문학에는 심미적 형식을 갖고 있다 했지만 결국 계급 의식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혁명문학에 의해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 후 곽말약은 마르크스의 유성기가 되자는 ‘유성기설’을 제기했고 이초리는 ‘일체의 문학은 모두 선전이다’라는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표어·구호 문학이 진행되었다. 혁명문학의 편협한 계급의식과 이 이론에 따른 표어·구호 문학은 모순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모순은 새로운 작품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소자산계급으로 취급하면 안되고 그 원인을 ‘새 작품’에서 찾아야 함을 지적했다. 또 그는 표어·구호 문학을 만들게 된 원인을 혁명에 대한 열정은 있으나 문예의 본질을 무시하거나, 문예를 협의의 선전도구로 간주하는 사람들, 혹은 이러한 무시나 편견은 없지만 문예에 대한 소양이 부족한 사람들에 의해서라고 했다. 창조사와 태양사는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모순을 자산계급으로 간주해버렸으며 ‘표어·구호 문학’이란 용어 또한 악의적인 공격이 내포되었다고 여겼다.
노신은 줄곧 계몽주의 주장을 바탕으로 문예가 응당 인생을 위하고, 인생을 개량하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고 예술을 위한 예술에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문예의 심미 특성을 중시하여 교훈적인 혁명문학에도 반대했다. 1928년의 혁명문학 논쟁 중 그는 문예에 선전작용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지만 ‘먼저 내용의 충실과 기교의 발전을 추구해야지 간판을 내거는 데 바쁠 필요는 없다’고 지적하며 혁명이 구호, 표어, 포고, 전보, 교과서 외에도 문예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때문에 그런 표어·구호적인 작품들을 무산계급 혁명문학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서 실제로 무산자 계급의 문학이란 없다고 말했다. 노신의 의견 역시 중시되지 못하고 비판을 받았다. 혁명 문학가들은 자신들과 다른 일체의 의견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2. 현실성과 초월성
문예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과 관념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냐에 있다. 이것은 유물문예관과 유심문예관의 기본 분야이다. 유물주의 문예가는 현실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문예를 현실의 반영이라 여겼지만 유심주의 문예가들은 의지와 의식이 현실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창조사와 태양사의 혁명 문학가들은 유심주의 문예관을 형성하여 생활의 실천 경험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고 무산계급의 의식을 획득해야만 무산계급 혁명 작가가 될 수 있고 무산계급 혁명작품을 써 낼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모순은 그들의 발간지에 실린 소설 몇 편에 대해 생활에 대한 진실한 감정이 부족하다고 비판했고 사실 작가에게서 귀중한 것은 ‘진실한 감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새로운 발견과 계시를 얻어 정령과 영혼이 들어간 새로운 작품을 얻는데 있다고 했다. 이러한 모순의 지적에 혁명 문학가의 한명인 장광자는 신 작가는 새로운 관념을 가지고 새로운 생활을 표현하고 구 작가는 진부한 관념을 가지고 있어 시대 생활과 격리되어 오히려 구 작가들이야말로 진실한 감정이 부족하다고 보았으며 관념이 일차적 개념이자 창작의 출발점이며 진실한 감정은 이차적인 개념이라 여겼다. 장광자의 시는 표어·구호화의 대표이며 소설에서 묘사한 혁명가와 반혁명가는 모두 한 가지 표정만을 가지고 있는 같은 부류로서 살아있는 인물이 아닌 기계적인 인물 같았다. 그의 <짧은 바지 당>은 당시 상해 노동자들이 일으킨 실제적인 봉기와 혁명 열정을 반영했지만 생활에 대한 진실한 감정이 결핍되어 결국 조잡한 기사거리 같았다. 당시의 혁명문학 작품에는 거의가 이러한 개념화, 공식화의 경향이 존재했다. 구추백은 이에 대해 ‘혁명적 낭만노맨틱 노선’이라 부르고 숙청을 원했고 화한 등 소수의 혁명 문학가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기도 했다.
혁명 문학가들은 생활에 대한 진실한 감정을 중시하지 못한 채 익숙하지 않은 혁명 투쟁 생활을 쓰도록 요구되어 있다. 이에 대해 모순은 마땅히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일을 선택하여 묘사해야 하기에 소자산 계급에 관한 내용을 쓰고 소자산계급을 묘사 대상을 삼을 것을 주장했지만 역시 많은 반대의견을 불러일으켰다. 그 중 전행촌은 프롤레타리아 작가가 묘사해야 하는 것은 단지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제거하기 위하여 활동적이고 역학적이며 전진적인 현실을 추출하여 묘사의 제재로 삼는 것이라 했다. 그 후에도 문단에서는 계속 작품의 묘사대상에 대한 논쟁이 계속 일어났다. 이에 혁명 문학가였던 반한년은 경험하지 못한 생활을 프로문학의 제재로 삼아야 하며 프로문학인지 아닌지는 작품이 표현하고 있는 관념 형태가 무산계급에 속하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또 일부 소자산 계급 청년들이 혁명문학의 사조와 다른 자신들의 작품에 회의를 품자 노신은 유행에 따를 필요가 없이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제재를 쓰라고 권했다.
혁명 문학가들은 노신의 창작이 현대적 의미를 상실하였다 보았다. 그들은 노신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청말이기에 5.4를 대표할 만한 작품은 실제로 많지 않다고 보았으며 노신이 암흑을 퍼뜨리며 혁명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당시 시대적 혁명 정세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였고 군중의 혁명 열정도 아주 높은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 당시 사회는 여전히 어두웠고 우매했다. 노신은 그들이 ‘암흑을 두려워하며 암흑을 은폐하고, 까치를 환영하고 올빼미가 우는 것을 싫어하듯 다만 상서로운 조짐만을 골라 자신을 마취시키며 시대를 초월했다’라고 지적했다. 바로 여기에서 초월성이 제기되었고 그 초월성이란 사실 시대에서 이탈하는 초월로써 노신의 풍자였음을 알 수 있다.
3. 계급 분석과 종파주의
1) 인식론적인 방면
계급분석은 마르크스주의가 사회를 연구하는 중요한 방법으로서 정확하게 하면 사회 상황이 더욱 분명해지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사회에 혼란을 발생시킨다. 창조사와 태양사 작가들은 문단의 작가들에 대해 계급적인 분석과 정치적 정리를 진행하여 적과 친구를 분명히 구분하면서 투쟁을 전개해 나갔는데 그들은 사회에 혼란을 야기시켰다. 즉 5.4 이래의 신문학자 중 곽말약을 제외한 거의 모두가 반혁명 또는 비혁명 작가라고 비판했다.
계급 분석은 사회의 성질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전제로 해야 하는데 혁명 문학가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계급 분석을 진행하여 오류를 범한 것이다. 중국은 여전히 반봉건, 반식민지 사회에 머물러 있기에 혁명의 근본적 임무가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것이었는데 창조사와 태양사 구성원들은 이미 공산당의 좌익 사조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아 중국이 이미 무산계급혁명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착각하고 현 시점의 계급전선에는 다만 무산계급과 자산계급만 있으며 혁명적인 것 과 반혁명적인 것만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경향의 작가가 아니면 모두 적으로 여겼다.
때문에 그들은 5.4신문학 작가의 긍정적인 역할을 무시하여 어사파는 ‘취미를 위주로 한 문예’이고 노신은 ‘어두컴컴한 술청에 앉아 술 취한 채 멍청한 눈으로 창밖의 인생을 바라보며’ 혹은 ‘차양 아래서 자신의 소설구문이나 베끼고 있다’고 매도했다. 특히 노신은 그들에 의해 소자산 계급에서 자산계급으로 뛰어올랐고 다시 봉건잔당으로 뛰어 올라 ‘이중적 반혁명 인물’이자 ‘뜻을 이루지 못한 파시스트’로 규정되었다.
2) 방법론적 방면
이러한 오류의 원인은 그들이 이 방법을 운용할 때 인과관계를 뒤바꾸었다는 데 있다. 그들은 작품 중에 표현된 사상의 실체를 가지고 작가의 계급적 성향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작가가 소속된 단체에 근거하여 작가의 계급 성분을 규정하고 다시 그것을 기초로 작품을 판단했다. 때문에 후기 창조사와 태양사 구성원의 작품은 모두 프로문학이며 기타 작가의 작품은 모두 자산계급 문학이었던 것이다. 섭령봉과 반한년이 편집한 <현대소설>에서는 중국 문단을 유산자와 무산자로만 나누어 사람에 따라 작가들의 성향을 구분했다. 이러한 분석은 너무 단순하고 기계적이어 실제 상황과는 맞지 않았다.
3) 종파적 정서
혁명 문학가들한테는 종파적 정서가 컸다. 때문에 창조사는 자아를 표현하는 예술을 제창할 때 다른 신문학 단체와 단결하여 함께 투쟁하지 못했고 다른 유파의 창작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으며 혁명문학을 제창한 뒤에도 혁명문학이라는 구호를 만들고 제창한 권리를 놓고 태양사와 크게 다투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만이 무산계급이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모두 자산계급으로 내몰았고 그들을 타도하는 것으로 자신의 권위를 세웠다. 이런 좌경 사상 및 종파적인 정서와 의욕으로 인해 혁명적 공포 분위기를 만들려는 심리가 발생하면서 혁명 문학가들은 문예 비평상에서 폭력적인 풍조를 만들었다. 특히 그들은 노신에 대해 계급 지위에서부터 태도, 기량, 본적, 가정,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비판하였다. 이에 노신은 ‘나는 무산계급이 엄밀하게 사리를 판단하는 법을 알지 못하며, 그러한 것을 배운 적도 없다고 여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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